아버지가 해주신 이야기(Stories My Father Told Me) - Stories Korean
- Arts & Culture
- History
글 Helen Zughaib
공저 Elia Kamal Zughaib
그림 Helen Zughai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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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 약 10여 년 전 쯤, 우리 집은 가족 저녁 식사가 끝나면, 유년기와 청년기 시절에 다마스쿠스와 레바논에서 있던 시절에 대한 아버지’의 일화로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는데, 부엌에 어머니와 둘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언젠가 너희 아빠가 이야기하시는 걸 녹음할 필요가 있다고 늘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이야기하시는 것 중 대다수는 아버지의 부모님과 친조부모님에 대한 것이었고 그 때마다 아버지는 아랍어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뜻하는 Jiddu와 Teta—라는 단어를 정감있게 사용하시곤 했다.
몇 주가 지나고, 워싱턴 D.C.에 있는 Al-Quds 갤러리 측에서 단독 전시회 작업을 해보자고 요청해왔다. 대화 도중에 나는 우리 아버지의 실화를 중심으로 하는 전시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미국 땅을 밟게 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나는 갤러리 측에 그림 몇 가지를 구상했다고 이야기 했는데, 각각 Jacob Lawrence의 유명한 시리즈인“ 흑인들의 이주(The Migration of the Negro) 스타일에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
갤러리는 그 아이디어를 정말 마음에 들어했지만 난 내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이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27년 다마스쿠스에서 태어난 내 아버지는 1933년에 레바논 베이루트로 이사했지만 가족을 만나기 위해 종종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 조부모님이 내 아버지를 미국으로 데려왔던 1946년에 아버지는 19살이었다.
처음에 아버지는 자신의 개인적인 가족 이야기라고 설명하며 내 요청을 거절했다. 내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다고 말했다. 약 한 시간 후에 아버지는 마지못해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 동의했다.
난 여러번 버지니아 주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한 부모님의’ 집에 가곤 했고, 식탁에 앉아 아버지가 작업하고 있었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걸 듣곤 했다. 이야기들은 길지 않았으며 아버지는 이야기마다 세부사항을 추가했다. 이는 내 작품을 비옥하게 했고 또한 대화를 하면서 아버지와 특별한 친밀감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난 이 시간들을 소중히 여긴다.
여러 해 동안 여러 이야기들이 모이고 또 모여 24개가 될 때까지 아버지와 나는 이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그게 마지막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난 아버지가 마음을 바꾸기를 계속 바라고 있다.
—Helen Zughaib
자선과 동정(Charity and Compassion)
Jiddu가 내 아버지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Jiddu는 자신의 아버지가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말문을 열었고 Jiddu는 절대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면서 내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옛날 온 나라에서 유명하고 매우 힘이 세며 아름다운 말 한 마리를 소유했던 amir[왕자]가 있었다. 다른 왕자들은 이를 부러워했고 그 말을 사려고 했지만 정작 주인은 항상 거절했다. 말의 주인인 왕자는 그 말을 파는 건 그의 가족을 파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어느 날 한 사기꾼이 말의 주인인 왕자를 부러워하는 왕자들 중 한 명에게 다가가 그 말을 훔치는 것을 제안했다. 합의가 성사되었다.
그 사기꾼은 그 아주 멋진 말과 주인인 왕자가 매일 지나가는 도로 한편에서 기다렸다. 말의 주인인 왕자가 다가오자, 그 사기꾼은 울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왕자는 왜 그러는지 묻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었고, 그 사기꾼은 자신이 매우 아프며 의사 진료가 필요하다고 하며 그 말에 오르기에는 너무 아프다고 대답했다. 왕자가 사기꾼을 돕기 위해 말에서 내려오자마자 사기꾼이 안장에 앉아 전속력으로 달렸다.
왕자는 큰 소리로 사기꾼을 불렀다. “"멈추면 그 말은 네 것이다." ”사기꾼은 왕자가 한 말을 절대 번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 멈춰서 돌아왔다. “왕자가 말했다. "이 말을 네가 훔쳤다고 말하지 마라."” “내가 네게 주었다고 말해라. 이렇게 해서 자선과 동정이 우리 공동체에서 사라지지 않게 해라. ”
건포도와 말린 무화과 만들기(Making Raisins and Drying Figs)
여름에 내 여동생과 나는 산에 있는 Jiddu와 Teta의 집에 방문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우리는 마음껏 정원에서 놀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Jiddu의 당나귀를 탔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건 우리가 kroum(크룸)[포도밭]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Jiddu가 포도와 무화과는 이슬이 남아있을 때 따야한다고 우겨서 우리는 매우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야 했다.
무화과를 수확하기 위해 Jiddu와 난 무화과 나무에 올라 익은 무화과를 바구니에 넣어 Teta와 내 여동생에게 내려주곤 했다. Teta와 내 여동생은 무화과를 천 시트에 펼쳐놓아 납작하게 만들고 깨끗한 무명천으로 무화과를 덮어 먼지와 곤충으로부터 보호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10일이 지나면 무화과는 건조되었고 겨울을 보내기 위해 보관될 준비가 되곤 했다.
그러나 건포도를 만드는건 더 복잡했다. Teta는 포도 송이를 꺾어 지푸라기로 덮인 흰 시트에 정돈해 놓았다. 내 여동생은 항상 보라색, 검은색 그리고 흰색의 색깔별로 정돈된 긴 줄로 포도를 정렬하길 원했다. Teta는 내 여동생에게 맞장구를 쳐주었고 비록 한번 건조가 되었더라도 포도는 모두 혼합되곤 했다. 포도가 내 여동생이 만족할만큼 정돈된 후 Teta는 포도를 뿌렸다. 데타는 포도밭에 인접한 경사지에서 자라는 tayyoun이라 불리는 허브 다발을 물푸레나무, 물 및 다른 재료를 혼합한 재료에 살짝 적셨고 그 액체를 포도에 뿌렸다.
매일 우리는 포도밭으로 돌아가 건조 중인 무화과 및 건포도를 확인하고 포도에 물을 뿌리곤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되면 우리는 항상 건조된 무화과, 건포도 그리고 도시 친구들과 나눌 새로운 이야기를 안고 포도밭을 떠났다.
올리브 나무 심기(Planting Olive Trees)
산골짜기 마을에서 Jiddu와 Teta를 만나는 것은 항상 특별했다. Teta는 나를 위해 특별한 사탕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곤 했다. 그렇지만 가장 좋았던건 Jiddu가 나를 데리고 밭으로 가는 것이었다. 종종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보기 위한 짧은 여행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가끔 Jiddu는 내가 “Jiddu의 도우미”가 되어 소소한 잡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어느 날, Jiddu는 내게 올리브 나무를 심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하루종일 올리브 밭에서 머물곤 했기 때문에 zuwaidy [소풍 도시락], 물 그리고 다른 먹을거리를 가져와야만 했다.
다음날 아침, Jiddu와 난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먹을거리와 자그마한 올리브 나무를 이고 가는 당나귀 한 마리와 함께 일찍 밭으로 출발했다. 우리는 Jiddu가 전에 파놓은 고랑에 어린 올리브 나무를 심으며 열심히 일했다. 내 일은 Jiddu가 각 나무를 심기 위해 땅에 작은 구멍을 파는 동안 나무를 똑바로 고정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난 물통에서 물을 퍼담아 각각의 새로운 올리브 나무에 물을 주었다.
점심 휴식 중에 난 Jiddu에게 내년에 올리브 작물 수확을 도우러 돌아오겠다고 이야기했다. Jiddu는 웃으며 올리브 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어려울 거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실망한 난 Jiddu에게 올리브 나무가 우리에게 열매를 안겨주기 전에 우리가 죽는다면 왜 올리브 나무 심는 것에 신경써야 하냐고 물었다. Jiddu는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Zara’u fa akalna, nazra’u fa ya’kulun." ”(“우리 선조가 심은 올리브 나무가 있기에 우리가 올리브를 먹는 것이고 우리가 올리브 나무를 심으면 우리 자손이 올리브를 먹을거야.”)
쇼박스(The Show Box)
(sanduk al-firji)
레바논 아이들이 극장 또는 텔레비전을 즐기기 한참 전에는 sanduk al-firji가 있었다. 이는 떠돌이 광대의 등에 묶여 있었던 밝게 장식된 반원형 박스였다. 떠돌이 광대는 큰 목소리로 그의 이야기를 노래로 예고하면서 마을로 찾아와 hara(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마을 광장에서 멈추었다.
떠돌이 광대는 우선 sanduk을 풀어 헤쳤다. sanduk의 높이는 18인치였고 각각 등거리에 위치한 다섯 개 또는 여섯 개의 둥근 유리 창이 있었다. 박스의 양 끝에는 “Antar 및 Abla” 또는 “Abu Zayd al-Hilali 등 한 개 이상의 전설적인 아랍 이야기를 보여주는, 밝게 광이 나는 그림들이 있는 두루마리에 달린 작은 내부 막대기 두 개가 있었다. ”
떠돌이 광대는 의자에 박스를 놓고 그 앞에 원형 벤치를 세웠다. 마을 아이들은 떠돌이 광대에게 교대로 자기 kharjiyyi를 건네 주어 돈을 쓰며 다섯 명 또는 여섯 명이 그룹을 지어 박스의 안을 엿보고 유리 창을 통해 이야기를 보았다. 광대는 화면을 감으며 여인의 아름다움, 남성의 용기 및 그들의 말의 힘에 대해 노래했다. 보통 운이 좋은 관객은 잠시 자신들의 자리를 kharjiyyi가 부족했던 형제자매 또는 친구들에게 양보하곤 했다.
쇼를 보고 싶었던 모두에게 쇼를 보여주고 난 후, 광대는 쇼박스를 그의 등에 묶고 의자와 벤치를 들어 올려 예고편을 노래하고 새로운 관객을 유도하며 다음 마을로 갔다.
광대가 감기는 두루마리에 있는 그림과 노래하는 이야기를 맞추는 방법을 보았을 때 난 매우 놀랐다. 그리고 화려한 그림과 많은 자그마한 거울이 달린 아름다운 sanduk 박스는 심지어 이야기가 없어도 놀라움을 자아내는 근원이었다.
분수식 식수대를 향한 걸음(Mishwar’ a al-‘Ayn)(Walk to the Water Fountain (Mishwar' a al-'Ayn))
옛날에는 마을에서 유일한 물 공급원이 공동 분수식 식수대였다. 젊은 여성인 sabaya는 일몰 즈음 머리 위에 큰 물 항아리를 균형 맞추어 지고서 식수대로 갔다. 식수를 얻기 위한 이러한 걸음은 긴 시간이 흐르면서 mishwar(“걸음”)로 알려진 기대를 모으는 사회적인 행사가 되었다.
식수대에서 sabaya는 멋진 드레스를 자랑하고 담소를 나누면서 수다를 떨곤 했다. 마을의 젊은 남성인 shabbab도 같은 시간에 젊은 여성을 보고 그들에게 천연스레 시시덕거리기 위해 식수대로 가곤 했다. 종종 젊은 남성 또는 여성은 특별한 사람에게 말 한두 마디를 꺼내기 위해 용기를 내곤했다.
이윽고, mishwar는 수용된 관습으로 남아 이제 마을 내 젊은이들이 집에서 수돗물을 사용하는 여부와는 상관없이 늦은 오후에 걷기도 하였다. sabaya와 shabbab은 만나서 서로를 동경하고 안전하게 두면서 시시덕거리곤 했다.
Teta의 방 에서 Basara 하기(Playing Basara in Teta's Room)
시리아와 레바논에서 Basara는 가장 단순하고 쉬운 카드 게임 중 하나다. 가족 중 나이가 든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게임 방법을 가르친다. 모든게 실패하고 어린 아이들을 얌전히 조용히 있게 하려면 Basara를 하는게 정답이다.
내 할머니인 Teta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가 바깥에서 놀 수 없었던 궂은 날씨 중에 할머니는 Basara 게임을 하자고 제안하곤 했다. 종종 우리는 게임이 끝나고 대접이 있을 것임을 충분히 알고 게임을 하자고 제안하곤 했다.
Teta 할머니는 자신의 방 양탄자에 앉곤 했다. 우리는 그녀 주변으로 둥글게 앉았다. 보통 Teta 할머니가 우리를 재밌게 하려고 패를 돌렸고 가끔이었지만 우리 중 한 명에게 대신 패를 돌려달라고 하곤 했다.
우리는 Teta 할머니와 Basara 게임을 하는 걸 좋아했다. 할머니는 작은 속임수를 눈감아 주었고 우리 중 한 명이 이길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에게 있어 Teta 할머니는 나이가 매우 많은 분이셨다. 그 때 우리는 할머니보다 나이든 사람을 몰랐다. Teta 할머니의 화려한 머리 스카프인 Teta의 빗으로 손질된 mendeel은 그녀의 머리에 둘러져 있었다. Teta 할머니는 여러 치마를 겹쳐서 맨 위에 밝은 앞치마가 오도록 입었다. 그 치마들은 매혹적이었다. 할머니는 치마 두 개 또는 세 개 아래에 집에서 만든 천 가방인 dikki에 리본을 달아 허리에 묶었다. 이 가방 안에 Teta 할머니는 잔돈과 열쇠를 일부 보관했다. 가장 흥미로웠던 열쇠는 Teta 할머니가 쿠키 및 사탕을 보관했던 자신의 방 안에 있는 작은 나무로 만들어진 찬장을 여는 열쇠였다. 다른 열쇠로는 Teta 할머니가 자신의 멋진 물건과 귀중품 그리고 고액의 금액을 보관했던 에나멜을 입힌 나무로 만들어진 큰 박스를 열었다.
게임이 끝난 후, 우리는 할머니의 찬장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달라고 물으며 조르기 시작하곤 했다. 찬장 안을 보게 해달라고 조르는게 실패하자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사탕을 달라고 조르기도 하였다. 다양한 형태로 조르는 데 결국 성공하여 사탕을 받아 나눌 수 있었다. 사탕이 충분하지 않았던 때에는 우리가 nigl이라고 부르던 약간의 잔돈을 나눠주시곤 하였다.
Kroum(포도밭)에서의 저녁(Evenings in the Kroum)
매 여름마다 난 레바논의 산골짜기 마을인 자흘레에 위치한 내 조부모님의 집에서 몇 주를 보냈다. 방문했을 때 가장 좋았던 점은 Jiddu와 내가 kroum, 즉, 포도밭으로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한 주 동안 일하고 이야기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날 Jiddu와 난 밭에서 일했다. Jiddu는 내게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이야기하곤 했고 특정한 방법으로 일을 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하곤 했다. Jiddu는 내게 이야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치 방문한 사람들인 것처럼 나무와 포도 덩굴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 방법으로, 그 korum(포도밭)은 가족과 공동체의 일부로 뒤얽혔다.
일을 하면서 Jiddu는 이 나무를 Jamil 삼촌이 태어난 때 심었고 또는 이 나무를 Wadi’a 이모가 결혼했을 때 심었다고 내게 이야기하곤 했다. 포도밭에 있는 모든 장소와 나무는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종종 국가 행사나 세계 행사와도 관련이 되었지만 대부분은 가족 행사와 연결되었다. 그 밭과 kroum(포도밭)은 나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었던 가족 역사의 일기장이 되었다.
또한 Jiddu는 kroum(포도밭) 안과 주변에서 자란 야생 나무와 허브에 박학하였다. Jiddu는 이것이 감기를 치료하는 데 있어 좋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배탈에 좋고, 스튜에 풍미를 더하는 데 좋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우린 이러한 수많은 허브와 야생화를 수집하여 겨울에 사용하도록 건조시키곤 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매 저녁마다, Jiddu는 등유 램프를 키고 숯불에서 허브 차를 끓이며 우리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곤 했다. Jiddu는 외국으로 간 사람과 일을 잘했던 사람(좋은 양), 잘 못했던 사람(검은색 양)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곤 했다. 그리고 Jiddu가 피곤하지 않았다면, Jiddu는 시를 낭독하거나 보통 윤리나 교훈이 담긴 이야기를 하곤 했다. Jiddu는 내게 절대 설교하지 않았지만 항상 내가 메시지를 습득하도록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Jiddu는 시를 낭독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고 낭독되는 시를 듣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종종 Jiddu는 내게 학교에서 배웠던 시를 낭독해달라고 했다. 난 최선을 다했지만 연달아 시를 듣는 것에 대한 그의 갈증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내가 13살이었을 적에, Jiddu는 내게 시를 낭독해달라고 했지만 난 고작 시 한 개와 다른 시의 일부만 기억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낭독을 멈추자, Jiddu는 등유 램프를 껐고 우리는 자러 갔다. 다음날 밤 Jiddu는 내게 더 많은 시를 낭독해달라고 물었다. 난 전날 밤 낭독했던 동일한 시를 반복했다. Jiddu는 내가 어제 저녁에 낭독했던 시와 동일한 시라며 군소리를 했다. 난 이게 내가 아는 전부라고 고백했다. Jiddu는 학교를 8년 다닌 후에 내가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시 한 개 반 정도이고 난 시간과 부모님의 돈을 낭비하고 있었으며 내가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하는 게 나을거라 이야기하기 전까지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그 이후에 Jiddu는 내게 시를 낭독해달라고 하지 않았지만 내게 이야기를 해주고 포도밭 안에 있는 다양한 나무에 대해 계속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시를 kroum(포도밭)에서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Teta의 집에서의 Subhiyyi(Subhiyyi at Teta's House)
이 의식은 절대 바뀌지 않았던 일상적인 아침이었다. 우리 손자 손녀들은 아침 활동(morning’s activities)을 방해하면 안 된다고 배우며 자랐다.
보통 모두 미망인인 여섯 명 또는 일곱 명의 나이든 여성이 내 할머니의 집에 모이곤 했다. 가을, 봄 및 여름에 그 모임은 식수대 주변 마당에서 열리곤 했다. 겨울에 그 모임은 숯 화로 주변 거실에서 열렸다. argilla [수도관] 두 개 또는 세 개가 준비되었고, 향이 나는 담배를 혼합해 물에 적셨다. 난 준비된 담배의 향기가 보통 캐럽 또는 포도 당밀과 혼합되어서 매우 좋았다. 그 향기는 당밀 및 우리가 결혼과 동일한 단어인 arouss라고 부르는 타히니 샌드위치를 먹고싶게 할 만큼 배고프게 했다.
10시 정도가 되면 이들은 담배에 흠뻑 취했다. 모임에 참가했던 여성들은 열려있었던 문을 항상 두드리지 않았다. 할머니는 할머니의 평소 자리에 앉곤 했고 각 여성은 각자의 동일한 자리에 앉곤 했다. 모임에 참가했던 여성들은 여러 슬립 위로 검은색 tannouras [긴 치마]를 띠와 함께 허리 주변에 묶어 모두 똑같이 옷을 입었다. 모임에 참가했던 여성들은 맨 위에 수가 놓인 조끼 위로 검은색 자켓과 머리를 덮는 옅은 파랑색 또는 회색 mendeel을 입었다. 젊은 시절부터 이어져 온 관습대로 요염하게 비스듬히 묶이곤 했다.
모임에 참가했던 여성들이 도착한 후, 각자 보통 몇 분 내로 내 할머니는 커피 의식을 시작하곤 했다. 커피 원두는 팬을 드는 손이 데이지 않도록 하는 작은 강철 팬인 mahmassi에 놓였다. 할머니는 색깔이 딱 맞다고 판단할 때까지 긴 손잡이를 가진 숟가락으로 서서히 로스팅된 원두를 저었다. 로스팅된 원두를 쟁반에 펼쳐 식히고 나면 한 여성이 로스팅된 원두를 mathani [커피 분쇄기]에서 빻았다. 할머니는 충분히 빻은 커피가 작은 나무로 만든 mathani 안 서랍에 모였다고 판단되면 화로 위 주전자에서 끓는 물에 넣어 젓기 시작했다. 커피가 끓어 넘칠 위기에 처하면 할머니는 화로에서 주전자를 떼어서 젓고 다시 화로 위에 올려놓았다. 이 과정은 세 번 반복되었고 두 번째 과정에서 설탕 몇 티스푼이 더해졌다. 커피는 작은 컵에 따라서 제공되었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항상 같은 이야기를 같은 여성이 해주고 있었지만 이야기하거나 듣는데 전혀 지루해보이지 않았던 것이 그 때나 지금이나 인상적이다. 그 이야기들은 중요한 발생 순서대로 거의 항상 홍수 또는 가뭄, 전염병 또는 혁명 등 여성들이 모두 기억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여성들은 거의 항상 자신들의 생일을 일부 재앙과 같은 사건이 발생한 때를 기억해내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기억해냈다. 내 할머니는 1865년 tawshi [혁명] 중에 태어났다. 모임이 끝나면, “tinthaker ma tin ‘aad” (“잊지 말아야 하지만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것”)를 합창했다.
할랍(The Hallab)
다마스쿠스의 옛 구역인 미단 내 밥 알무살라에 사는 작은 소년이었을 적에, 난 좁은 골목에서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던 다양한 행상인들에 매혹당했던 것을 기억한다. 과일, 채소, 사탕뿐만 아니라 칼갈이, 가지 치는 도구를 파는 사람과 오래된 물건을 사는 사람들 모두 노래의 선율에 빠져있었다. 이러한 운이 맞는 노래에 사실 팔거나 사는 물건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지만 색깔, 신선도 그리고 맛을 세부적으로 설명했다. 구매자들은 전통 음악을 통해 무엇이 팔리는지 알았고, 이는 또한 그 날의 메뉴를 좌우하기도 했다. 거리는 짐을 인 당나귀, 손수레 및 케익 및 다른 맛있는 것들로 높이 쌓인 대반(sddur)을 들고 있는 행상인들로 가득 찼다.
거리에서 놀고있거나 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특히 사탕팔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곤 했다. 팔리는 물건들은 일반적으로 계절에 따라 달랐다. 찌고 있는 조리된 사탕무와 팝콘은 겨울에 팔렸다. sweeq이라고 불린 시럽이 뿌려진 얼음은 여름에 팔렸다. Kaak과 manaquish는 연중 내내 팔렸지만 당밀이 뿌려진 타마리는 축제 기간에만 팔렸다. 변함없이 매일 용돈은 kaak과 za’atar(향신료 및 올리브 오일을 가미한 빵), 타마리 또는 한 움큼의 주머니에 넣어도 상하지 않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맛있는 과일인 hanblas로 대신했다. 보통 사탕은 다른 이들과 공유되거나 물물교환됨되었고, 매일 용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양을 넓혀주었다.
내 기억 속 가장 멋있었던 행상인은 신선한 우유를 노래하던 Hallab이었다. Hallab은 여덟 마리에서 열 마리 정도 되는 작은 다마스쿠스 염소 무리를 데리고 다녔다. 그 염소들은 대부분 크고, 갈색이었으며 순했다. 염소들의 목에는 달랑거리는 줄이 두 개 달려있었다. 작은 아이들은 학교가는 길에 염소들과 눈을 마주치며 먹이를 주고 안아주고는 했다. Hallab은 이를 신경쓰지 않았고 염소들과 아이들 모두 그 관심을 매우 좋아했다.
Hallab은 측량하는데 쓰는 캔으로 된 들통과 긴 대나무 막대를 가지고 다녔다. 주부가 문을 열어 우유를 주문하자 Hallab은 그곳에서 바로 염소 한 마리한테서 젖을 짜고는 했다. 그 주부가 요거트를 만들기로 계획했다면 더 많은 우유가 필요했을 것이다. 염소들이 무리로부터 떨어져 다니기 시작하면, Hallab은 다정하게 염소들을 무리로 이끌었다. 신선한 우유가 배달된 후 Hallab은 그 값을 받고 그의 아름다운 염소에 대해서 노래하며 길을 재촉했다.
다른 행상인들은 Hallab의 아름다운 염소들과 순하고 사랑스러운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는 기쁨으로 인해 그와 경쟁할 수 없었다. 분유가 식료품 및 잡화 선반에 나타난 이후 우유 맛이 예전 같지 않았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When a child is born)
옛날에는 집에서 산파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낳았다. 이것이 가족 중 여자들이 열렬히 나서는 사건이었다. 여자들은 "밀어라"와 다소 동등한 의미를 지닌 “sa’adi waladik”라는 말을 산모에게 해주며 분만 중인 산모가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추도록 산모에게 “손수건을 물라고” 격려하며 산파를 도왔다.“ ”그들은 분만을 도와주거나 그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모여든 방문객들을 위해 커피, 차, zhurat 그리고 yansoon 음료를 만들기도 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산파는 아이의 아버지와 남자들에게 아이가 별탈 없이 태어났으며 아이의 성별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주어 자신의 직업상 의무를 마쳤다. 이를 통해 산파에게 돈과 봉사료를 지불했다. 봉사료의 규모는 아이의 성별과 가족이 남자 아이 또는 여자 아이를 원했는지 여부에 따라서 달랐다.
산파가 떠난 후, 아이를 출산한 산모는 화려한 비단 침실복을 입었고 갓 태어난 아기는 아기 자루에 들어간 것 같이 화려한 배내옷을 입었다. 아빠가 될 사람은 방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재정 상태에 따라 산모의 베개에 보석을 두거나 아기 요람에 한 조각 이상의 금화를 놓았다.
산모 방에서부터 zalagheet가 울려퍼지기 시작하는데, 이는 축제나 다른 특별한 행사 때 부르는 노래의 한 종류이다. 모든 이웃과 가족들이 참여할 때까지 할머니가 이를 주도했다.
그리고 40일 동안 산모는 남편의 재력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비단 자켓을 바꿔 입어가며 관리를 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웃,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 들려 부모를 축하하고 자발적으로 조언 및 수다를 떨었다. 이 기간 동안, 손님들은 향신료, 가루로 된 쌀 및 설탕을 반죽한 mughly라고 불리는 음식을 대접받았다.
mughly가 대접된 후 아이가 첫 이가 났을 때 대접되는 snaniyyi가 대접되었다. Snaniyyi는 끓인 밀, 설탕, 사탕 절임 및 밝은 색깔의 사탕으로 만든다. 큰 쟁반에 maward와 mazahar [꽃과 장미 향수]가 맨 위에 뿌려진 채 높이 쌓인다. 먹기 딱 좋아 보여서 아름답다.
악마의 눈과 다른 불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파랑색 구슬과 작은 성상 그리고 히잡을 옷과 아기의 침대에 꽂는다. 파랑색 구슬과 파티마의 손이 악마의 눈으로부터 보호하고 동시에 히잡, 부적은 아이를 질병, 병원균 및 다른 재앙으로부터 보호한다. 히잡은 삼각형의 바느질된 작은 포장물로써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부적 또는 축문을 영적인 힘으로 숨긴다. 아이가 자라면, 히잡은 속옷으로 바느질되어 보호하는 힘이 계속 유지되도록 할 수 있다. 히잡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개봉되거나 모독되어서는 안 된다.
맹목적인 자선(Blind Charity)
언젠가 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가 다음 날에 데이르 사이드나야로 간다고 이야기 했을 때 딱히 특별한건 없었고 난 내가 원하면 아버지와 동행할 수 있었다.
데이르는 다마스쿠스의 외곽에 위치한 수도원이었고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자선단체였다. 난 내가 즐기고 기대했던 여행이었기 때문에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내게 자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난 사람들이 그러한 행동을 통해 특수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때문에 좋은 행위로 인식한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내게 기부자가 받는 사람과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맹목적인 자선에 대해 물었다. 아버지는 나아가 이러한 종류의 맹목적인 자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는 가장 신실한 행위라고 설명하였다.
번영한 항구 도시 통치자의 아내인 매우 부유한 여성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그 여성은 방수 목적으로 큰 바구니에 타르를 바르곤 했다. 바구니 아래에, 그 여성은 "비록 그들이 자리에 없을 수 있어도 모든 행동이 보상받기 때문에 자선 활동을 하여라"라는 시 한 구절을 쓰곤 했다. ”그리고 그 여성은 그 바구니에 음식, 물 및 옷을 담아 바다에 놓아 파도와 바람에 실려가도록 하곤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그 여성과 그 가족은 다른 항구 도시에 사는 친척을 만나기 위해 장기간 배를 타고 여행했다. 거친 폭풍우가 배를 완파하여 많은 탑승자가 물에 빠졌다. 그 여성 또한 물에 빠졌고 잡고 매달릴 널빤지조차 없었다. 시간이 지나, 그 여성은 해안으로 떠내려갔고 배고픔, 갈증 및 탈진으로 인해 쓰러졌다.
그녀는 어떤 정원에서 깨어났다. 그 집의 여주인은 자신의 종들이 그 여성을 해안에서 찾아 죽은줄 알았지만 살아있음을 알고 정원으로 데리고 왔다며 그 여성에게 이야기했다. 그 집의 여주인은 그 여성이 자신의 종들과 세탁부 일을 하면 같이 머무를 수 있다고 이야기 하였고 그 여성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어느날 여주인은 빨래감을 가득 넣은 큰 대나무 바구니를 가져와 그 여성에게 이를 빨아달라고 요청했다. 바구니의 바닥의 그 여성이 손을 닿자, 그 여성은 자신이 바다에 내려놓기 전에 바닥에 적곤 했던 시 한 구절을 보았다. 그 여성은 자신의 바구니임을 알아챘다. 그 여성은 털썩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여주인이 빨래를 확인하러 왔을 때 그 여성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여성에게 우는 이유를 묻자, 세탁부는 그 바구니가 그녀의 바구니 중 하나였음을 설명했고 일부 난파당한 사람들이 바구니를 찾아 안에 담긴 음식과 물을 먹고 살아남는 것을 생각하며 자신이 식량을 넣었던 방식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주인은 놀라서 그 여성에게 자신과 남편이 난파당했었다고 이야기했다. 여주인과 남편은 모든걸 잃었었다. 그러고 나서 큰 바구니가 떠내려 왔고 가까운 해변에 다다를 때 까지 그 바구니에 매달렸다. 여주인과 남편이 활기를 되찾았을 때, 도시로 가 직업을 가졌고 시간이 지나 크게 번창할 수 있었다. 감상적인 것을 떠나서, 여주인과 남편은 언젠가는 바구니와 맹목적인 자선을 예찬하는 바닥에 쓰여진 시 한 구절로부터 더 많이 배울 수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바구니를 보관하고 사용했다.
여주인은 자신의 숙소로 세탁부를 데려와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그 날의 사건을 이야기했다. 그는 세탁부에게 가족으로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또한 여주인과 남편은 언젠가는 필요한 이가 이를 찾아 생존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바구니에 음식을 넣어 바다에 놓는 것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작별 인사(Saying Goodbye)
오랜 기다림 후에, 미국 여행 허가를 받았다. 베이루트에서 뉴욕 시까지 가는 배편을 예약했고 출발일이 정해졌다. 마을에서 작별 인사가 시작되었다. 친척, 친구 및 이웃이 집으로 와 커피를 마시며 이미 이주한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출발일 이틀 전에 모든 가족이 베이루트로 여행하여 호텔에 머무르며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어머니는 마침내 미국으로 이주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내 어머니는 심지어 자는 도중에도 특별한 가방에 모든 여권, 표 및 모든 보석과 돈을 담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또한 미국에 있는 어머니의 친척들에게 줄 선물이 여행 가방에 안전하게 포장되었는지 확실히 해야 했다. 다마스쿠스에서 어머니의 여동생의 선물로 구매한 큰 동양적인 스타일의 양탄자는 따로 포장되었고 항상 어머니의 시야가 닿는 곳에 보관되었다. 호텔 직원, 친척과 나는 모두 이틀 동안 그 양탄자를 지켰다.
출발일 아침에 배가 부두에 들어오기에는 너무 크다는 것이 파악되었다. 승객, 여행 가방, 막바지 선물 및 양탄자는 4명의 선원을 통해 모두 큰 노를 젓는 보트에 실려야 했다. 어머니는 배의 안정성에 무슨 영향을 미치든 간에 양탄자 위에 앉을 거라고 주장했다. 큰 배에 안전하게 올려졌을 때 어머니는 선원에게 모든 여행 가방과 양탄자를 어머니의 객실에 놓아달라고 요구했다. 어머니와 선원들은 항해에 필요하지 않은 모든 것을 선창에 놓아야한다는 여부에 대해 논쟁하였다. 결국 한 선원이 나서서 어떤 것도 도난당하지 않을 거라고 보장하였다.
현재, 이 카펫은 내 딸 Karen의 집에 아주 잘 보관되어 있다.
미국에 오다(Coming to America)
장기간 항해가 끝났다. 도착하기 전날 밤 저녁 식사를 하는 중에, 우리는 우리가 탄 Vulcania라는 배가 다음날 새벽 4시에 자유의 여신상 옆을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린 승객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보자고 즉흥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고 나서, 베이루트 항구에서 뉴욕 시 행 배를 타고 16일이 지나 시리아, 레바논 및 팔레스타인에서 온 우리는 활기가 넘쳐 새벽의 자유의 여신상을 맞이하기 위해 밤을 샜다.
이 날 아침을 기억한다. 청명한 아침이었다.
About the Author
Elia Kamal Zughaib
Elia Kamal Zughaib studied at Syracuse University, and in 1959 he joined the U.S. Foreign Service to work in Syria, Lebanon, Iraq, Kuwait and France until his retirement in 1978. He lives in Alexandria, Virginia.Helen Zughaib
Artist Helen Zughaib was born in Beirut. She received a bachelor’s degree in fine arts from Syracuse University’s College of Visual and Performing Arts. Her most recent solo exhibitions were at the Arab American National Museum, which hosted the full original series “Stories My Father Told Me,” and at University of Maryland University College and the Mamia Bretesche Gallery in Paris, which showed “Conflict Within.” She lives and paints in Washington, 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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